지속 이수진

지속

이수진

Duration
2024. 6. 21 - 6. 29

우리는 지속되는 시간 속에서 서로 다른 경험과 기억을 저장하며 자아를 형성해간다.

어떤 사람, 더 나아가 어떤 것을 알아간다는 것은 그것의 ‘총체적 시간’을 이해하는 과정이다.

공예유물은 오랜 시간 축적된 경험, 사건, 기억의 ‘지속된 시간’이 담긴 역사적 사물이다.

내가 사용하는 재료 본질의 이해와 행위의 당위성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공예의 총체를 바라보는 것은 작업의 출발이 된다.

공예유물의 지속된 역사에 새로운 나의 조형을 더하여 문과 질이 빈빈한 ‘창조적 지속’을 이어가고자 한다.

나의 작업은 수많은 행위, 과정의 시간, 물리적 겹의 반복으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단순히 축적된 ‘시간의 겹’이라 정의하기에는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언제나 고민이었다. 프랑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의 시간 개념인 ‘지속’은 이러한 고민에 대한 나름의 방향을 설정하는 바탕이 되었다.

베르그송은 시간이란, ‘분절된 순간의 나열이 아닌 이질적 새로움의 연속으로 창조가 일어나는 지속이다’ 라고 설명한다. 칠하고, 연마하고, 더하고, 또 다시 같은 행위를 반복해야 비로소 결론지을 수 있는 그 과정들이 단순한 기술적 반복이 아닌, 창조를 향한 새로움의 연속이라는 나름의 해석은 위안이 되었고, 행위의 당위성에 대한 고민을 덜어내게 하였으며 무엇보다 작업에 대한 확신의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생명을 지닌 듯 매순간 표정을 달리하는 옻칠 물성의 특성은 단순한 반복이라 하기에는 변화 무쌍하고 그러기에 여전히 다루기 쉽지 않다. 작업과정의 고단함으로 때로는 쉬운 길을 택하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나름의 고집을 지속하는 이유는 옻과 싸우고, 화해하고, 타협하는 그 시간들이 지루하지 않기 때문이다. 온전한 색을 피우기까지 색색의 감정을 만들어내는 그 미묘한 설렘의 시간이 좋다.

작업 과정에 담긴 재료와 행위 과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은 칠예 이면의 과정처럼 어떤 것을 이루어내기 위한 과정 또한 아름다울 수 있음을 시각적으로 강조하기 위함이다.

공예 유물의 차용은 인류와 함께 시작하고 쓰이며 앞으로도 계속되어질 공예품에 내포된 ‘지속’의 의미를 통해 주제를 확고히 하고, 익숙함과 낯섦의 감성을 유발하여 우리 전통과 옻칠에 대한 매력을 환기하기 위함이다.

전통에의 머묾이 아닌 전통과 현대, 공예와 회화, 입체와 평면의 간극을 메우는 것과 동시에 아우르는 가교 역할의 작업이 되길 바란다. 다른 것을 돋보이게 하고, 보조 역할을 하기도 하며 때로는 존재가치를 한껏 드러내는 옻과 같이 말이다. 옻의 ‘지속’을 위해 옻의 확장 가능성과 기대를 이끌어내야 할 것이다. 그 역할을 하는 데 조금이나마 힘을 보태는 것이 나의 바람이자 목표이다.